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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역사에서 ‘바지역’(pants role, trouser role)이 등장한 배경은 단순한 캐스팅의 편의가 아니라 음악적, 사회적, 그리고 성별 개념의 변화가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다. 특히 17~18세기 유럽에서는 성악의 기술적 요구와 사회적 규범이 맞물리며, 특정 음역대의 남성 역할을 여성 성악가가 맡는 전통이 자리 잡았다. 옥타비안(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케루비노(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오스카(베르디의 《가면무도회》) 같은 인물들이 여성 메조소프라노나 소프라노에 의해 연기되는 이유 역시 이러한 역사적 흐름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오페라에서 바지역의 기원
역사상 가장 훌륭했던 옥타비안중 하나를 연기했던 브리짓 파스벤더

 

바지역의 발생: 카스트라토의 쇠퇴와 여성 성악가의 부상

 

17~18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황금기에는 고음역의 남성 성악가인 카스트라토(castrato)가 주요 남성 역할을 독점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인권과 윤리의식이 발달하며 어린 소년을 거세하는 관습이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카스트라토가 사라진 자리를 대체하기 위해 두 가지 대안이 떠올랐다. 첫째는 테너가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이었고, 둘째는 여성 성악가가 남성 역할을 맡는 방식이었다. 작곡가들은 고음역의 남성 역할을 포기하기보다, 메조소프라노와 콘트랄토의 목소리를 활용해 음악적 일관성을 유지하기를 택했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바지역이 형성되었다. 여성 성악가들은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카스트라토가 내던 매혹적이고 유연한 선율을 훌륭히 소화할 수 있었다.

 

왜 여성이 남자 역할을 맡게 되었나?

  1. 음역과 음악적 요구
    작곡가들은 종종 젊고 에너제틱한 남성 캐릭터를 위해 높은 음역대와 빠른 기교가 필요한 아리아를 작곡했다. 청소년기의 남성을 표현하기 위해 테너보다 부드럽고 유연한 음색이 필요했고, 이는 메조소프라노와 콘트랄토의 목소리에 더 잘 맞았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속 케루비노는 아직 목소리가 변성되지 않은 소년으로 설정되어 있어 남성 테너보다 메조소프라노가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2. 연기적 설득력
    바지역의 남성 캐릭터들은 대개 청소년이거나 미성숙한 남자로 등장한다. 성숙한 남성의 신체적 특징을 표현하기보다는, 젊은 남자의 경쾌함과 유연함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했다. 여성 성악가들은 무대 위에서 슬림한 체형과 민첩한 움직임으로 소년의 이미지를 더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었다.
  3. 사회적·문화적 맥락
    19세기에는 성 역할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엄격했지만, 오페라 무대는 이를 일시적으로 전복시키는 공간이었다. 관객들은 여성 성악가가 남성 의상을 입고 남자를 연기하는 것에서 독특한 매혹을 느꼈다. 당대에는 이 같은 성 역할의 전복이 ‘위험한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소비되기도 했다. 특히 옥타비안처럼 여성 성악가가 남자 역할을 연기하면서 다시 여성 캐릭터로 위장하는 장면은 관객에게 이중적 성적 긴장감을 선사했다.

 

대표적인 바지역 캐릭터들

1. 케루비노 (피가로의 결혼)
14세 소년으로, 청춘의 설레임과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해 메조소프라노가 배치된다. 케루비노의 아리아 “그대는 아는가(Voi che sapete)”는 변성기 이전 소년의 순수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부드럽고 여성적인 음색이 오히려 곡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2. 옥타비안 (장미의 기사)
슈트라우스는 옥타비안을 메조소프라노로 설정하며, 여성이 남자를 연기하는 동시에 다시 여장하는 장면을 만들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는 성 역할에 대한 복잡한 심리적 장난을 가능하게 한다.

3. 오스카 (가면무도회)
발랄하고 기민한 성격의 시종 캐릭터로, 빠르고 장난기 많은 아리아를  소프라노가 소화하며 극의 활기를 더한다.

 

 

바지역이 주는 예술적 가치

오늘날에도 바지역은 단순한 전통이 아니라 오페라 무대에서 독창적인 표현 수단으로 살아 있다. 여성 성악가가 남성을 연기하는 방식은 성별의 경계를 흐리며 음악과 연기의 새로운 긴장감을 만든다. 청중은 이를 통해 오페라가 단순한 이야기 전달을 넘어선, 인간 정체성과 표현의 자유를 탐구하는 예술임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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