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의 세계는 단순한 가창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
지난 35년간(1990–2025), 세계 무대에서 성공한 약 100여 명의 성악가들을 분석하면,
이들은 단지 ‘노래를 잘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음악성과 존재감을 예술로 조직한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이들 속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성공의 공통분모는 무엇인가?
음색, 테크닉, 연기력, 무대 위 존재감 모두가 필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요소들 사이에도 우선순위와 구조적 연관성이 존재한다.
우선 음색은 분명 성악가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다.리카르도 무티나 제임스 레바인 같은 세계적 지휘자들은 성악가를 오디션할 때, 음역이나 테크닉보다 먼저 음색의 고유함을 들었다. 이를테면 디아나 담라우의 청아하면서도 날카로운 고음, 리사 다비드센의 강철 같은 중음, 안나 네트렙코의 어두우면서도 매혹적인 중성 음색은 각자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음색의 서명(signature) 같은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좋은 음색만으로는 그 이상을 넘어서기 어렵다는 점이다. 음색은 입장을 결정하지만, 남는 것은 ‘설득력’이다.
테크닉은 음색 다음으로 자주 언급되는 요소지만, 기술은 무대에서 인상보다 기능에 가까운 역할을 한다. 세계 무대를 장악한 소프라노들과 테너들—예를 들어 조수미, 루치아노 파바로티, 르네 플레밍, 브린 터펠—이 공통적으로 가진 것은 기술 그 자체보다는 기술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특히 현대 성악에서는 '과시적 기교'보다 ‘기술이 감정과 해석을 어떻게 지지하는가’가 더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된다. 리셋 오로페사처럼 놀라운 콜로라투라를 구사하는 성악가도, 결국 극의 감정선 안에서 기교를 사용했기에 ‘기술자’가 아닌 ‘예술가’로 평가된다. 즉, 테크닉은 결정적이라기보다 전제 조건에 가깝다.
연기력은 시대에 따라 점점 더 중요해지는 요소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영상 중계, 극장 외 공연 확대, 크로스오버 등 무대 외적 매체가 늘어나면서 음악과 연기의 일체화는 필수가 되었다. 이전 시대 성악가는 서서 부르면 되었지만, 지금의 디바와 디보들은 역할로서 살아가는 방식으로 무대에 선다. 나탈리 드세이, 소냐 욘체바, 크리스티안 게르하허처럼 연기를 통해 음악의 논리를 감정의 언어로 변환시키는 성악가들이
무대에서 훨씬 더 깊은 몰입과 평판을 얻는 이유다.
그렇다면 결정적 요소는 무엇인가?
100명의 경로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점은 바로 무대 위 '예술적 프레즌스(presence)'였다. 이 프레즌스란 단지 잘 보이거나 큰 소리를 낸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무대 위에서 관객의 집중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고, 극의 구조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정서의 중심축으로 확장시키는 힘이다. 프레즌스는 네 가지 요소의 복합체다. 즉, 음색의 개별성, 기술의 정교함, 연기의 통합력 그리고 정서적 설득력을 갖춘 해석력이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태도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다. 성공한 성악가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어떤 방식으로 말할지를 알고 무대에 오른다. 그들의 노래는 역할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언어로 극을 다시 창조하는 능동적 창작이다. 예를 들어 줄리아 레즈네바는 기술적으로 탁월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지만, 단지 기교를 넘어서서 음표 하나에 문학적 정서를 불어넣는 해석력이 있었기에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았다. 리사 다비드센은 폭발적인 성량보다 소리의 깊이와 감정의 골격을 짜는 설계 능력이 있었기에 바그너 역할에서 압도적인 무대를 만들었다. 그 누구도 ‘기술적으로 최고’였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통해 관객에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억된 것이다. 무대에서 성공한 성악가는 결국 자신의 예술 언어를 구축한 사람이다. 그 언어는 단지 음성이나 음색의 수준이 아니라, ‘내가 이 음악을 어떻게 살아내고, 어떻게 공감시키며, 어떻게 시간 위에 남길 것인가’에 대한 예술가의 주체적인 감각과 태도에서 비롯된다.
결론적으로, 성악가로 성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 하나의 능력이 아니라, 프레즌스를 형성하는 총체적 예술 역량이며, 그 중심에는 반드시 자기 해석력과 감정의 언어화 능력이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지난 35년간 세계 오페라 무대에서 관객이 가장 오래 기억한 이름들의 공통된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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