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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고전 음악의 역사에서 카스트라토(Castrato)는 한때 전 유럽의 오페라 무대를 지배했던 전설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윤리적·사회적 문제로 인해 인위적인 거세는 전면 금지되었고, 이로써 카스트라토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악계에서는 카운터테너(Countertenor)라는 새로운 남성 성악가들이 오히려 과거보다 더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필립 자루스키(Philippe Jaroussky), 프랑코 파지올리(Franco Fagioli), 야쿱 오를린스키(Jakub Orliński) 등 현역 카운터테너들은 현대 성악 팬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으며, 바로크 음악의 르네상스를 이끌고 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이 시대에 카운터테너가 이토록 각광받는가? 그리고 카운터테너의 핵심인 팔세토(Falsetto) 창법은 과연 어떻게 구사되는 것인가?
카스트라토의 몰락과 카운터테너의 탄생
카스트라토는 17~18세기 유럽 오페라의 전성기 동안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남성 성악가였다. 어린 시절 거세로 인해 후두가 발달하지 않아 여성과 비슷한 고음역대를 유지했지만, 성인 남성의 폐활량과 흉강 공명을 바탕으로 여성이 낼 수 없는 강력한 고음을 만들어냈다. 파리넬리(Farinelli)와 세나시노(Senesino) 같은 카스트라토들은 오페라 하우스마다 수많은 관객을 열광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비인도적 거세는 윤리적 문제로 19세기 말에 금지되었고, 카스트라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카스트라토의 공백을 메운 것은 바로 카운터테너였다. 카운터테너는 성대의 생리적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팔세토를 극도로 발달시켜 카스트라토의 고음을 재현하는 성악가다. 20세기 중반 알프레드 델러(Alfred Deller)에 의해 본격적으로 부활했으며, 오늘날 필립 자루스키, 프랑코 파지올리, 야쿱 오를린스키 등 뛰어난 테크닉과 매력적인 음색을 가진 카운터테너들이 등장하며 이 장르의 대중화에 성공했다.
왜 카운터테너가 현대에 인기를 얻고 있는가
카운터테너의 인기는 단순히 과거의 카스트라토를 대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몇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 바로크 오페라의 부활
현대 들어 바로크 음악과 고음악(古音樂)의 해석이 재조명되면서 카운터테너의 무대가 급격히 늘어났다. 헨델(Handel), 비발디(Vivaldi), 퍼셀(Purcell) 등 바로크 작곡가들은 카스트라토를 염두에 두고 수많은 주역 아리아를 남겼는데, 이 곡들은 자연스럽게 카운터테너의 레퍼토리가 되었다. - 독특하고 중성적인 음색의 매력
카운터테너의 소리는 여성 소프라노보다 어두우면서도 남성 테너보다 투명한 독특한 음질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중성적 음색은 현대 청중의 귀에 신선하게 다가오며, 성별을 초월한 미묘한 감정 표현에 이상적이다. - 비주얼과 퍼포먼스의 진화
야쿱 오를린스키는 뛰어난 성악 실력뿐 아니라 현대적 외모와 무대 퍼포먼스로 젊은 관객층까지 끌어들였다. 유튜브와 SNS를 통해 카운터테너의 공연 영상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대중적 인지도가 상승했다. - 기술적 숙련도의 향상
현대 카운터테너들은 고도로 훈련된 성악 테크닉으로 팔세토 음역뿐 아니라 흉성(chest voice)까지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이로 인해 전통적 한계를 넘은 새로운 표현력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팔세토 창법의 비밀: 해부학적 분석
팔세토(falsetto)는 카운터테너의 핵심 기술이다. 일반적인 성대 발성 방식과 달리 팔세토는 성대의 진동면 일부만을 사용하여 높은 음역을 낸다.
- 성대의 해부학적 변화
팔세토는 성대의 윤상피열근(cricothyroid muscle)을 수축시켜 성대를 길게 늘여 얇게 만든다. 이때 성대는 가장자리(edge) 부분만 진동하며, 두꺼운 전층(full vocal fold)이 진동하는 가슴소리보다 훨씬 높은 주파수를 생성한다. - 공명강 조절
팔세토를 효과적으로 내기 위해서는 비강과 두개골 공명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카운터테너들은 공명강의 공간을 넓혀 소리를 증폭시키고, 공명을 머리 위로 띄우는 듯한 ‘헤드 보이스’의 감각을 유지한다. - 흉성과 두성의 연결
고급 카운터테너들은 팔세토와 가슴소리를 부드럽게 연결해 음역 전환의 경계를 거의 느낄 수 없도록 한다. 이를 믹스보이스(mixed voice)라 부르기도 한다. 이 기술은 성대의 내전근(adductor muscle)을 정교하게 조절해야만 가능하다. - 호흡의 세밀한 조절
팔세토는 얇은 성대 진동으로 인해 공기의 소모가 많기 때문에 안정적이고 세밀한 호흡법이 필수적이다. 횡격막의 지지(diaphragmatic support)와 복식호흡을 결합해 일정한 기류를 유지해야만 소리의 일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
카운터테너의 발성과 테크닉 비교
카운터테너의 발성법은 테너와 비교했을 때 여러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테너는 주로 가슴소리와 두성을 중심으로 노래하며, 성대의 전층을 진동시켜 밝고 힘찬 음색을 낸다. 이에 반해 카운터테너는 팔세토를 주된 발성 방식으로 사용하며, 성대의 가장자리만 진동시켜 부드럽고 중성적인 소리를 구현한다. 테너의 공명은 주로 흉강과 구강에서 이루어지는 반면, 카운터테너는 두개골 공명과 비강 공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로 인해 카운터테너의 소리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가벼움과 동시에 맑고 투명한 울림을 가진다. 기술적 난이도에서도 차이가 있다. 테너는 주로 강한 발성의 안정성과 고음에서의 힘을 요구받지만, 카운터테너는 팔세토를 유지하면서도 흉성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높은 수준의 테크닉이 필요하다. 레퍼토리 측면에서도 뚜렷한 차이가 있다. 테너는 주로 베르디, 푸치니와 같은 낭만주의 오페라 작품에 등장하며, 웅장하고 드라마틱한 아리아를 소화한다. 반면 카운터테너는 헨델, 비발디, 퍼셀과 같은 바로크 작곡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화려하고 민첩한 콜로라투라 기법을 요구하는 아리아들을 자주 부른다. 이러한 점에서 카운터테너는 단순히 테너의 고음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발성과 레퍼토리로 자신만의 영역을 확립한 성악가라고 할 수 있다.
결론: 카운터테너는 왜 현대적 아이콘이 되었는가
카운터테너는 과거 카스트라토의 공백을 단순히 메운 대체자가 아니다. 이들은 팔세토라는 고도로 정제된 발성법을 통해 중성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음색을 창조했고, 바로크 음악의 부활과 함께 현대 성악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필립 자루스키의 벨벳 같은 소리, 프랑코 파지올리의 폭발적 표현력, 야쿱 오를린스키의 무대 카리스마는 카운터테너의 새로운 전성기를 이끌고 있다. 이 독특한 성악가들은 한계를 넘는 테크닉과 감성으로 고전과 현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카운터테너의 목소리를 경험한 이들은 결코 그 매혹적인 울림을 잊을 수 없으며, 이 음역대가 가진 예술적 가치와 현대적 가능성은 앞으로도 더욱 확장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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