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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스모 오페라 : 현실을 찢고 나온 감정의 음악극

goldberg-bach 2025. 7. 3. 21:25

9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등장한 베리스모(Verismo) 오페라는 기존 오페라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오페라의 정체성을 확장시킨 운동이었다. ‘진실성’ 혹은 ‘사실주의’를 뜻하는 ‘Verismo’라는 용어처럼, 이 흐름은 음악 형식보다는 극적 리얼리즘, 감정의 원초성, 사회적 현실성을 앞세우며, 오페라가 가진 전통적 이상미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베리스모는 로맨틱한 고귀함이나 귀족 중심의 갈등, 혹은 신화와 전설을 주요 소재로 삼던 오페라의 틀을 벗어나, 민중의 삶, 일상의 고통, 그리고 감정의 폭발을 예술로 치환했다.

 

베리스모 오페라
2008년 샌 디에고 오페라에서 팔리아치로 분한 테너 호세 쿠라

 

음악 형식의 전환 : 아리아의 해체와 감정의 흐름 중심 구조

베리스모 오페라는 기존의 벨칸토 오페라나 고전주의 오페라에서 중심이 되었던 아리아-레치타티보 구분 구조를 거의 완전히 해체한다. 이는 가장 핵심적인 형식상의 변화이다.

예컨데, 도니제티나 로시니 시대에는 아리아가 감정의 정점을 형식적으로 구성하는 독립된 음악 단위였다. 그러나 베리스모 오페라에서는 극적 상황 속에서 감정이 자연스럽게 전개되며 음악이 그 흐름을 따라간다.

푸치니, 마스카니, 레온카발로와 같은 베리스모 작곡가들은 선율을 상황의 긴장도에 따라 자유롭게 이어붙이고 끊으며, 음악을 하나의 연속된 대사처럼 다룬다. 이러한 방식은 말과 음악, 감정과 리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극적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특히 관현악의 서술 기능 강화가 특징적이다. 베리스모 오페라의 오케스트라는 성악을 단순히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정서의 배경, 인물의 무의식, 긴장감의 고조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전주곡에서 느껴지는 비극적 정조는 이미 관객에게 서사의 비극성을 각인시킨다.

 

조성법과 화성의 변화 : 감정에 의한 구조의 유연성

베리스모 오페라는 엄격한 조성 체계보다는 감정의 동선에 따라 화성과 조성을 유동적으로 전개한다. 기존 오페라에서는 토닉-도미넌트 중심의 예측 가능한 조성 진행이 음악의 긴장과 해소를 이끌었지만, 베리스모에서는 그 공식이 느슨해진다.

감정이 불안정하거나 충돌하는 장면에서는 불협화음, 반음계 진행, 돌출되는 조성 전환을 자주 사용한다. 이는 의도적으로 음악의 긴장 구조를 흔들고, 극적 순간을 청각적으로 극대화하기 위한 작곡적 장치이다.

이러한 방식은 후대의 표현주의 오페라, 영화 음악, 심지어 현대 드라마틱 사운드트랙의 기초가 되었다.

 

성악 표현의 변화 : 기교보다 감정의 직진성

베리스모 오페라는 성악가에게 음악적 기교보다 감정 전달의 밀도와 강도를 요구한다. 벨칸토 오페라에서처럼 콜로라투라, 트릴, 정교한 다이내믹 조절보다는, 소리 자체가 감정의 직접적인 출구가 되는 방식이다.

성악가는 단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분노, 절망, 질투, 격정, 체념 등 날 것의 감정을 그대로 전달해야 하며, 때로는 거친 음색과 과감한 음량으로 극의 흐름을 압도해야 한다.

예컨데 《팔리아치(Pagliacci)》의 ‘Vesti la giubba’는 벨칸토에서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감정적 절규가 필요하며, 극 속 인물이 실제로 고통을 겪고 있음을 소리 자체로 설득해야 한다.

 

 내용과 소재의 전환 : 신화에서 골목길로

베리스모 이전의 오페라는 대부분 역사적 인물, 신화, 전설, 귀족 세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반면 베리스모는 그 무대를 현실의 골목, 시골마을, 시장, 선술집, 농민의 집으로 이동시켰다.
주인공은 왕이나 영웅이 아니라, 사랑에 실패한 청년, 불륜에 고통받는 여성, 복수심에 찌든 이웃들이다.

이러한 소재는 음악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고귀함을 위한 형식미 대신, 현실적 감정을 중심으로 음악적 리듬이 변형되고, 비정형적 구성과 파격적 클라이맥스가 만들어진다.
이처럼 소재의 변화가 음악 형식의 변화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베리스모는 단순한 스타일이 아닌 오페라의 ‘사상적 전환’이었다.

 

베리스모, 예술적 정교함을 넘어선 감정의 생명력

베리스모 오페라는 고전적 형식과 미학을 해체하고, 음악을 통해 날 것의 감정과 현실의 진실을 드러낸 혁신적 양식이다.
형식적으로는 아리아 구조의 해체, 조성의 유동성, 오케스트라의 감정화라는 큰 전환이 이루어졌고, 내용적으로는 민중 중심의 사실주의가 전면화되었다.

결국 베리스모는 ‘아름다움’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고통, 질투, 분노 같은 날것의 감정 자체를 음악으로 살아 움직이게 만든 예술의 진화였다. 이 흐름은 오늘날 영화 음악, 현대 뮤지컬, 심지어 TV 드라마의 서사 구조에도 영향을 주고 있으며, 클래식 오페라의 한계를 확장한 결정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