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벨리니 오페라의 멜리즈마: 이탈리아 벨칸토의 정수와 오늘날 명가수의 해석

Golden Camel 2025. 7. 14. 16:53

19세기 초 이탈리아 오페라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작곡가 빈첸초 벨리니(Vincenzo Bellini)는 “벨칸토(bel canto)” 양식을 정점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그의 오페라에서는 극적인 서사와 더불어 화려하고 유려한 선율이 어우러지는데, 이 가운데 멜리즈마(melisma)는 벨리니 음악의 핵심적 장치이다. 멜리즈마는 하나의 음절 위에 여러 개의 음을 부드럽게 이어서 노래하는 기교로, 단순한 장식음을 넘어 감정의 고조와 극적 긴장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벨리니 오페라에서 멜리즈마의 역할

벨리니의 멜리즈마는 단순한 기교적 장식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선과 밀접하게 연결된 서사적 장치이다. 예컨대 “노르마(Norma)”에서는 여주인공이 내면의 고뇌와 결단을 긴 호흡의 멜리즈마로 풀어낸다. 이 기교는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리듬과 선율의 유연한 흐름 속에 감정의 미묘한 층위를 담아낸다. 현대 성악가들은 이러한 멜리즈마 구간에서 완벽한 호흡 조절과 균일한 음색, 그리고 감정선이 살아 있는 프레이징을 통해 청중의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벨리니 오페라의 멜리즈마
현재 가장 인기있는 디바 중 한명인 소프라노 소냐 욘체바가 노르마를 연기하고 있다.

1. 노르마(Norma) – Casta Diva

<노르마>의 대표 아리아 ‘Casta Diva’는 여사제 노르마가 달의 여신에게 기도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며, 벨리니의 멜리즈마 기법이 절정에 달한 작품이다. 긴 선율 위에 펼쳐지는 멜리즈마는 숭고하면서도 내면적 긴장을 표현하며, 성악가의 호흡과 감정 이입 능력을 동시에 시험한다.

 

현대 최고의 해석자: 소프라노 소냐 요네체바(Sonya Yoncheva)는 최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Casta Diva>를 노래하며 청중과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그녀는 풍부한 음색과 부드러운 레가토로 멜리즈마의 흐름을 완벽히 유지하며, 고음에서도 압도적인 안정성을 보여준다. 특히 요네체바는 각 멜리즈마 구간마다 세밀한 감정 표현을 더해 노르마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2. 몬테키와 카풀레티(I Capuleti e i Montecchi) – Oh quante volte

<몬테키와 카풀레티>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로, 줄리엣의 아리아 ‘Oh quante volte’에 멜리즈마의 정수가 담겨 있다. 이 곡의 멜리즈마는 줄리엣의 간절한 사랑과 애틋한 정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현대 최고의 해석자: 리세트 오로페사(Lisette Oropesa)는 이 아리아에서 완벽한 기교와 맑은 음색으로 벨칸토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녀는 숨결이 섞인 듯한 부드러운 멜리즈마와 빠른 패시지에서도 흔들림 없는 음정으로 줄리엣의 심정을 절절히 표현한다. 오로페사의 해석은 단순히 기술적 과시를 넘어 감정의 섬세함까지 녹여내어 청중을 사로잡는다.

 

 

3. 청교도(I Puritani) – Qui la voce sua soave

<청교도>의 아리아 ‘Qui la voce sua soave’는 벨리니의 마지막 오페라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극적인 멜리즈마 구간이다. 이 아리아는 여주인공 엘비라가 연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광기에 가까운 서정을 토해내는 장면으로, 성악가에게는 극도의 집중력과 기술적 완성도를 요구한다.

 

현대 최고의 해석자: 조수미(Sumi Jo)는 <청교도>의 엘비라 역할에서 벨칸토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극도로 빠른 멜리즈마 구간에서도 놀라운 정확성과 유연성을 발휘하며, 맑고 투명한 고음으로 청중을 압도한다. 조수미의 해석은 엘비라의 심리적 불안과 절망을 섬세하게 표현하면서도, 탁월한 레가토와 트릴(trill)로 기술적 정수를 보여준다. 그녀의 <Qui la voce>는 기술과 예술성이 조화를 이루는 대표적 명연이다.

 

 멜리즈마는 감정의 호흡이다

벨리니 오페라의 멜리즈마는 단순한 장식적 기교가 아니라 인물의 심리와 극적 전개를 완성하는 본질적 요소이다. 현대 성악가들은 이 전통적 기법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켜, 청중에게 깊은 몰입감과 예술적 감동을 선사한다. 소냐 요네체바, 리세트 오로페사, 조수미와 같은 성악가들은 멜리즈마 구간에서 기술과 감정을 완벽히 조화시켜 “음악에 생명을 불어넣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벨리니의 멜리즈마는 결국 성악가에게 있어 기술적 절정과 예술적 영혼을 함께 요구하는 시험대라 할 수 있다.